"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을 읽고 있다. 책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얘기만 하는데, 꼭 전쟁 뿐이랴 삶에서도 살아 남기 위한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항명은 정당한가"편은 내용 중에 내가 지금까지 잘 못했었고, 앞으로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 블로그에 남겨 둔다. 하지만 마지막 구절의 아부/아첨 얘기는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이 안드는 건 어쩔 수 없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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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는 <구변>편에서 "명령에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이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승패의 판단을 현장의 장수가 궁궐에 있는 임금보다 더 잘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판단은 장수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올바르게 나온다.
장수는 전쟁터의 상황에 대해 임금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장수가 제아무리 상세한 보고를 한다 해도 고의든 실수든 무의식이든 빠뜨리는 게 있고, 그렇게 누락시킨 사소한 정보가 때로는 정황 판단의 결정적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바람이 말을 해 주는 곳이 바로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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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출동을 명령했다. 이순신은 육지의 험한 지형에 숨어 있는 안골포 등의 적을 후방에 남겨놓고 적진 깊숙이 있는 부산까지 가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유성룡이 <<징비록>>에 남겼듯 이순신은 '머뭇거렸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조정이 당황했다. 전시에 임금의 명령을 일선 장수가 거부하는 항명 사태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출동을 재촉하기 위해 급기야 도원수 권율이 직접 한산도까지 찾아온다. ... 이순신에게 남은 건 항명에 대한 응징뿐이었다.
이순신이 쫓겨나고 새로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도 같은 숙제를 안게됐다. ... 하지만 출동 명령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순신의 예에서 직접 목격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권율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며 원균의 곤장을 쳤다. ... 그런 망신을 당하고 1주일이 안돼 원균은 내키지 않는 출정에 올랐다. 그리고 그 길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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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윗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법이 없다. 설령 장수로 대변되는 아랫사람의 판단이 옳은 것으로 나중에 판단되더라도 '그래 네 똥 굵다' 정도의 감정만 갖는다. '이놈은 언제든 내 말을 거스를 수 있는 놈' 이라는 인식, '이놈은 내 새끼가 아니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건거가 될 뿐 '이놈은 국가의 동량(쓸만한 재목)'이라는 각성의 순간은 임금에게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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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명은 사정이 허락한다면 즉시,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라도 보복으로 돌아온다. 장수는 임금의 잘못된 명령을 거슬러 승리하면 미운 털이 박혀서 죽고, 임금의 잘못된 명령을 따르면 전투에서 죽는다. 원균이 그랬고, 계백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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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이기는 싸움은 임금이 싸우지 말라고 해도 싸워 이기고, 반드시 지게 돼 있는 싸움은 임금이 싸우라고 해도 싸우면 안된다"고 했다. 이순신은 임금의 명령보다 자신의 전략적 판단을 앞세워 이겼다. 그러나 주어진 길은 가시밭길이요, 남은 선택은 자살이라 의심스러운 전사였다. 임금이야말로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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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많은 장수들은 좌평 임자(의자왕때 신하)의 길을 걷는다. '알아서 기는' 선택을 한다. 자신이 현장에서 보고 느낀 최선의 판단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임금의 뜻을 미루어 짐작하고 그 뜻에 맞게 행동한다. 나라를 위한 행동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대신에 임금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나라를 위한 고민 끝에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봤자 기다리는 건 가시밭길 밖에 없다는 걸 벌써 400년 전에 이순신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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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을 잘하는 군인이 아닌 보고서 잘 쓰는 군인이 출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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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는 임금을 대할 때 역린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역린은 용의 목덜미에 거꾸로 난 비늘인데, 순한 용도 이걸 건드리면 누구든 바로 죽여버린다. 대부분의 경우 역린은 임금의 권위다. 항명의 결과가 승리인지 패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항명이라는 행위 자체로 임금의 권위에 상처를 입히는 게 문제다. 임금은 싸움에 지는 건 용서해도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건 용서하지 않는다.
"비단 대단 곱다 해도 말같이 고운게 없다"고 했다. 장수는 항명을 고민하기 이전에 임금을 설득해야 한다.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싸움에 지지도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적과 싸우느라 정신 없겠지만 등 뒤에 있는 임금의 관심도 살펴야 한다. 이걸 아부라고 부른다면 아부, 아첨이라고 부른다면 아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수는 깨진 유리창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민감한 촉수를 세우고 살아야 하는 존재다. 그 촉의 대상은 부하들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임금이기도 하다. 왜 쓸데없는 일에 힘 빼느냐고 푸념할 필요 없다. 그게 장수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그래서 장수 해먹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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